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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천서원 춘향제 봉행

기사입력 2013.03.2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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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천서원 춘향제 봉행

    22일 정오부터 금사면 기천서원에서 춘향제가 봉행되었다.


    초헌관에는 김춘석 여주군수, 아헌관은 길두호 의원, 종헌관은 장학진 의원이 맡아 제례를 봉행했다.





    변동구 원장을 비롯하여 홍씨 문중 인사와 관련 공무원 등 100여명이 함께 한 춘향제와 더불어 가을에는 추향제가 열린다.







    눈발이 날리는 등 봄을 시샘하는 쌀쌀한 날씨에도 참석자들은 신발을 벗고 제를 올렸다.

    기천서원은 야산 중턱에 위치하고 문화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여주군은 지난해 1억 원을 들여 상수도 시설과 방화시설을 완비했다.

    그러나 주차장이 협소하고 도로경사가 급해 접근성이 떨어지고 향 후 도로보수 등의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성현들을 추모하고 봉양하는 서원정신이나 온고지신도 중요하지만 첨단화되는 지식사회와 소셜시대에 대한 균형적인 예산편성과 군정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귀를 기우릴지 귀추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 기천서원은 1580년(선조 13)에 여주목사인 박승임(朴承任)이 유림과 논의하여 중종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안국(金安國)을 추모하기 위해 마생동에 마암사원(馬巖書院)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41)에 현 위치에 복원하였고, 1611년(광해군 3)에 이언적(李彦迪)과 홍인우(洪仁祐)를 추가 배향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기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661년에 정엽(鄭曄), 이원익(李元翼), 홍명구(洪命耈)가, 1708년(숙종 34)에 이식(李植)이, 1802년(순조 2)에 홍명하(洪命夏)가 추향되어 총 8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 후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정책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37년에 김영진 등 지역 유림 백여 명이 기금을 모아 사우를 중건하고 모현사(慕賢祠)라 하였다.
    1979년에는 서예가 김충현의 후원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기천서원으로 복구하였다.
    이어 1987년과 1994년에 부속건물이 중수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서원은 남양홍씨 종친회에서 관리하며,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은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을 보였고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홍인우(洪仁祐, 1515∼1554)는 어버이의 병환으로 의서를 배워 약의 처방을 알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정엽(鄭曄, 1563∼1625)은 대사헌을 다섯 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 가지 직임을 겸하기까지 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63세에 죽었으며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 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이식(李植, 1584∼1647)은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했고 별시관(別試官)으로 출제하였다가 시제에 역의(逆意)가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홍명구(洪命耉, 1596∼1637)는 평안도관찰사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근왕병(勤王兵) 2,000명을 거느리고 남하하던 중, 김화(金化)에 이르러 적의 대병과 맞닥뜨렸다.

    시자(侍者)를 통해 노모에게 결별(訣別)의 글을 보낸 뒤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적 수백 명을 살상한 끝에 전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그가 순절한 터에는 1650년(효종 1) 김화 고을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祠)를 세웠다. 그리고 1652년 의열(義烈)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평양의 충정서원(忠正書院), 자산(慈山)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홍명하(洪命夏, 1608∼1668)는 효종의 신임이 두터워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하였고 효종이 죽자 삭직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1663년(현종 4)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6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망하자 그가 나서서 엄정한 태도로 논리를 펴 반격하여 돌려보내 왕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다.순조 때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 한국서원이야기 (http://cafe.daum.net/psj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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